<정종기 성결대 교수/칼럼니스트/인간관계회복연구소장>

 

연말이 되니 모임이 많습니다. 친구들은 세월을 이길 장사(壯士)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세월 앞에서 겸손을 배워간다는 고백입니다. 달력이 올해도 한 장 남았습니다. 이해인의 「12월의 시」 중에 묵은 달력을 떼어내며 고백한 마음을 알듯합니다.

"또 한해가 가버린다고/ 한탄하며 우울해하기 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요/(중략) /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 준비하며 조용히 말하렵니다./ 가라, 옛날이여/ 오라, 새날이여/ 나를 키우는데 모두가 필요한/ 고마운 시간들이여." 친구들은 매일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쉰다는 것도 인생에서 가장 고뇌의 순간이라 합니다.

아침이면 출근하듯 서둘러지다가 자신을 발견하면 순간 초라해지고 작아지는 것은 세월이주는 또 다른 공부라 합니다. 12월은 깊어집니다. 달력이 한 장씩 뜯겨질 때면 아팠던 상처들이 아물어지는 것은 세월이 약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깨닫게 합니다. 연소(燃燒)하는 세월들은 애간장 끊어질 것 같던 아픔의 순간들을 희망으로 건너게 하는 징검다리가 되는 거룩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세영 시인의「12월」은 우리 주위로부터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유성처럼 소리 없이/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허무를 위해서 꿈이/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쓰러 마라/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사랑은 성숙하는 것/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눈 떠라/절망의 그 빛나는 눈"이라는 시의 속살처럼 인생은 늘 희망에 산다고 하지만 내일의 희미한 세월을 더듬어가는 친구들에게서 연민을 느낍니다.

 

저 깊은 마음속 솟아오르는 서러움은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인생은 하루를 발판삼아 열흘을 만들고 한 해를 만들어 냄은 지나간 시간들의 희생의 덕분이겠지요. 지난 일을 생각하며 부끄러워하는 것은 변화 속에 성숙 해졌다는 뜻입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는 메시지가 또 다른 삶의 희망의 씨앗을 심는 친구들에게 위로의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은 살아있는 물고기를 쉼 없이 헤엄치도록 하듯 흐르는 세월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희망의 날개를 퍼덕이며 살아가도록 합니다.

 

우리 생애 어두운 날, 가장 슬픈 순간에도 인생은 성숙해진다는 긍정의 힘을 깨닫게 하는 오세영 시인의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는 간절함을 고개 숙인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