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기 성결대 교수·칼럼니스트/인간관계회복연구소장

 

추분을 지내니 퇴근길에는 어두움이 빠르게 달려옵니다. 어두움이 빠르니 저녁시간이 넉넉해지는 기분입니다. 어두움은 신체적인 리듬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조석으로 스쳐가는 바람은 습기 가득 머금은 여름의 공기와 달리 호흡하기도 좋습니다. 공기의 감촉은 환절기 때 어머니가 목에 감아주시던 명주수건 감촉입니다. 하늘의 뭉게구름을 가벼운 공기로 살랑 걷어 내니 털처럼 가벼운 새털구름이 됩니다.

 

지난주 햇볕이 좋아 시골길을 산책했습니다. 여름 뙤약볕에 까칠하게 서있던 수숫대는 제법 알곡을 품고 겸손함을 익혀가는 가을 풍경입니다. 폴싹거리며 뛰어오르는 여치며 메뚜기가 여물어가는 벼논에 뛰어다니며 추억을 풀 속에서 헤집습니다.

 

어두움이 내리니 수수밭에 바람 달려가는 소리가 제법 예리하게 들립니다. 날카로운 검들이 스쳐가는 소리 같아 어릴 적 억새풀에 손가락 베이던 아픔의 추억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가을 소리를 제일먼저 알린다는 오동나무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딸아이를 둔 아버지는 오동나무 심고 가꾸는 옛 이야기를 생각해 내곤 마음 아려하는 소리 같아 눈을 감습니다.

 

딸아이 성장은 보라색 오동나무 꽃 같아 예쁠 때가 어제 같은데 가을소리 벌써오는 것 같아 바보아빠가 됩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시간의 빠름을 알려주는 선구자는 귀뚜라미 소리일 것입니다. 댓돌 아래서, 풀숲에서 가을 온 것을 게으른 사람들에게 알리기나 하듯 세차게도 울어댑니다.

 

인생도 세월의 탁류에 떠가는 낙엽과도 같습니다. 빠른 세월의 혼탁함 속에서도 손을 내밀어 사랑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가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더니 그 친구하는 말 “친구야 살아있어서 고맙다.” 하던 우스갯소리 같은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 것은 살아온 날보다 떠나야 할 날이 훨씬 적게 남았기 때문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대한 아쉬움과 남아 있는 시간을 잘 보내야 할 텐데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로 조용히 손을 모아봅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엔 겸손함의 기도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이웃과 국가를 위한 기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홀로라 생각하는 이들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은 기도와 사랑과 감사가 있기에 희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