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기 성결대 교수·칼럼니스트·인간관계회복연구소장

 

긴 장마 끝에 무더위가 찾아왔습니다. 작열하는 태양 속에 며칠 후면 중복입니다. 복날은 삼계탕이나 시원한 음식을 찾습니다. 햇볕에 잘 자란 수박을 우물에 담가 두고 시원해지기를 기다리던 추억이 있습니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 우물에 띄워둔 수박을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고 있던 손자들이 안타까워 할아버지는 쌈지 돈 풀어 얼음 사오라 하셨습니다. 얼음집에는 더위가 대목이었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면 얼음집 아저씨, 큰 톱으로 얼음을 쓱싹 쓱싹 잘라 지푸라기로 꼰 새끼에 묶어주었습니다. 녹아서 떨어지는 얼음물이 꼭 몸속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라 한달음에 달려오면 어머니는 얼음을 함지박에 넣고 깨뜨릴 준비를 했습니다.

 

아이들은 까치발 세워 함지박 안을 들여다보며 얼음에 바늘을 대고 망치로 살짝 두드리기만 해도 깨어지는 것을 보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수박을 쩍쩍 갈라 숟가락으로 둥글게 떠내 얼음과 섞으면 시원한 화채가 되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제일 먼저 할아버지 떠 드리고 위아래 순서대로 나눠 주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큰 그릇에 담아준 화채는 온몸과 머릿속까지 시원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의 행복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모깃불 피워두고 누이들 평상에 누워 수박껍질 얇게 저며 얼굴에 마사지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추억은 유자효 시인의 「여름 」이 생각납니다.

 

"이 여름에/우리는 만나야 하리./여미어 오던/가슴을/풀어헤치고/우리는 맨살로 /만나야 하리. /포도송이처럼 /석류알처럼/여름은 /영롱한 땀방울 속에/생명의 힘으로 /충만한 계절. /몸을 떨며 다가서는 /저 무성한/성숙의 경이 앞에서/보라./만남이 이루는/이 풍요한 여름의 기적."

 

냇가에서 멱 감던 추억은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입니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곳으로 떠난 친구들도 있고 벌써 할아버지 행세를 하는 친구들도 생겼으니 물 자맥질하며 소란 떨던 그 추억은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설익은 포도송이 친구들과 알맹이 개수대로 세며 나누던 추억은 공의로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더위에 수박화채는 집안의 예절을 알게 했고 모깃불 피워놓고 누이들 평상에 머리 맞대고 누워 수박껍질로 마사지 하던 정경이 그립습니다. 이렇듯 불볕더위는 자연을 살찌게 하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당겨옵니다.

여름의 아낙들은 보양을 위해 다양한 음식을 차려내는 지혜가 있습니다. 시원한 콩국수, 냉면, 메밀국수는 여름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음식이라면 삼계탕은 땀 흘려서 부족해진 단백질을 보충하고 수분이 배출되어 힘들어할 때 화채를 통해 건강을 지키게 하는 선조들의 지혜가 생각납니다. 뜨거운 태양은 건강의 지혜를 다듬게 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길러내는 시기인가 봅니다.